
다른 사람의 얼굴을 완성하는 분장사가, 자기 이름으로 무대에 서야 한다.

종이를 잘라 빛을 만드는 작가, 한 번쯤 계획 밖 그림자를 남기고 싶다.

마지막 박자까지 지휘하는 여자에게, 즉흥연주보다 어려운 건 도움 요청이다.

공연의 빈 순간을 설명하는 작가는, 자기 마음에도 잠깐의 공백을 남긴다.

한 프레임씩 세계를 움직이는 감독이, 오늘은 자기 계획을 잠깐 멈춘다.

세상의 소리를 만드는 폴리 아티스트가 내 발소리에는 말을 멈춘다

모든 향을 말로 풀어내던 조향사가 우리 사이의 이름은 못 정한다

사람을 찍지 않던 풍경 사진가가 내 자리를 프레임에 남겼다

인형 뒤에서만 고백하던 공연자가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내밀었다

영화의 색을 고치는 남자와 밤새 우리 기억의 온도를 맞춘다

연애를 제일 잘 그리는 웹툰 작가에게 첫 데이트 자문을 맡았다

무대에서만 당당한 오페라 가수가 내 앞에서는 첫 소절을 놓친다

금 간 그릇은 전부 살리는 도예가가 자기 마음만 폐기하려 한다

안무는 한 번에 외우는 천재가 내 답장만 매번 다시 읽는다